충주 석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충주 석씨는 고려 시대 무인 석린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석린은 고려 의종과 명종 때 활동하며 상장군과 동서북면병마사를 역임했고, 후손들은 충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시대에는 석린의 6세손 석양선이 태조 이성계의 이모와 혼인하여 홍양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석여명은 고려 말 성균관 생원에 급제했으나 조선 개국 후 벼슬을 거부했다. 충주 석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경상남도 창녕군,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상주시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석수민, 석재준, 석진형 등이 있으며, 영주 강동리 충주석씨재사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충주 석씨는 41,802명, 홍주 석씨는 1,009명으로 총 42,81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충주 석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충주 석씨 |
한자 표기 | 忠州 石氏 |
이칭 | 홍주 석씨 (洪州 石氏) |
관향 | 충청북도 충주시 충청남도 홍성군 |
국가 | 한국 |
종류 | 씨족 |
창시자 | 석린 |
웹사이트 | 충주홍주석씨대종회 |
역사 | |
구성 | |
관련 인물 | 석현준 |
인구 통계 | |
2015년 인구 | 42,811명 |
주요 인물 |
2. 역사
충주 석씨의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무인이다. 고려 의종 때 일어난 경인난(庚寅亂)에서 이의방에 의해 서경낭장(西京朗將)으로 발탁되었고, 1176년(고려 명종 6) 두경승을 따라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그 뒤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5]
석린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태조 이성계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석양선의 손자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로 분관(分貫)했다.
석수명의 동생 석여명(石汝明)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이 집현전제학을 내려 주었음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6]
석여명(汝明)의 아들 석문성(石文成, ? ∼ 1380년)은 1364년(고려 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통진(通津)·동성(童城)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7]
2. 1. 시조 및 고려 시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무인인 '''석린'''(石隣)이 시조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의 경인난(庚寅亂)에 이의방에 의해 서경낭장(西京朗將)으로 발탁되었고, 1176년(고려 명종 6)에는 두경승을 따라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가 인정되어 상장군(上將軍),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그 뒤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5]석린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태조 이성계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석양선의 손자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로 분관(分貫)했다.
석수명의 동생 석여명(石汝明)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이 집현전제학을 내려 주었음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6]
석여명(汝明)의 아들 석문성(石文成, ? ∼ 1380년)은 1364년(고려 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통진(通津)·동성(童城)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7]
2. 2. 조선 시대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무인이다. 고려 의종 경인난(庚寅亂) 때 이의방에 의해 서경낭장(西京朗將)으로 발탁되었고, 1176년(고려 명종 6) 두경승을 따라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상장군(上將軍),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그 뒤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5]석린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태조 이성계의 이모인 관계로 조선 개국 후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석양선의 손자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했다.
석수명의 동생 석여명(石汝明)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이 집현전제학을 내려 주었음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6]
석여명(汝明)의 아들 석문성(石文成, ? ∼ 1380년)은 1364년(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신돈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77년(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통진(通津)·동성(童城)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7]
3. 인물
충주 석씨의 주요 인물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인물이 있다.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는 고려 시대 인물로는 석수민, 석주, 석천보, 석천경, 석수명, 석여명, 석문성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 인물로는 석여명, 석재준, 석진형, 석성국, 석창문 등이 있다.
3. 1. 고려
- 석수민(石受珉, 1077년 ∼ 1160년) :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석신(石信)의 아들이다. 1105년(고려 숙종 10) 판강신호위 제일대정(判羗神虎衛第一隊正) 등을 역임하였다. 1145년(고려 인종 23년) 예빈랑(禮賓郞)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 겸 태자좌감문수부수(兼太子左監門率府率)에 제수되었다.
- 석주(石胄) : 고려 충렬왕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아들 석천보(天補)·석천경(天卿)과 함께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교만과 횡포가 지나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1303년(충렬왕 29) 김세(金世)가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석주 일당이 충렬왕을 받들어 섬으로 도망하기 위하여 배를 만들며 양식을 비축한다고 고소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단사관(斷事官)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에 의하여 아들들과 함께 연경(燕京)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김세와 대질한 결과 죄가 입증되어 가산(家産)은 적몰(籍沒)되고, 아들들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
- 석천보(石天補) : 밀직부사(密直副使) 석주(石胄)의 아들. 내료(內僚)로서 아우인 석천경(天卿)과 더불어 성색(聲色)으로써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다. 관현방(管絃坊)의 대악(大樂)과 재인(才人)이 부족하다 하여 행신(倖臣)들을 각 도로 보내어 관기(官妓)로서 인물과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뽑았다. 또 도성 안의 관비(官婢)나 무당으로 노래와 춤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궁중에 입적(入籍)시켜 비단옷을 입히고 말총모자를 씌워 남장(男裝)을 한 뒤 이들과 가무(歌舞)를 일삼으며 막대한 비용을 썼다. 1303년(충렬왕 29) 충렬왕을 호위하여 섬으로 피하였으나, 원나라를 배척하려 한다는 김세(金世)의 고소로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 석천경(石天卿) : 석천보의 동생.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303년 김세(金世)가 반역 음모를 참소하자 그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형 천보와 함께 연경(燕京)에 압송된 뒤 안서(安西)로 유배되었다.
- 석수명(石壽明) :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 석여명(石汝明) : 호는 화원(花園). 고려 후기인 1374년(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불출하였다.
- 석문성(石文成, ? ∼ 1380년) : 좌찬성(左贊成) 석여명(汝明)의 아들. 1364년(공민왕 13)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 : 지금의 경기도 수원)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으며, 1377년(우왕 3) 왜구가 수안(守安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통진(通津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동성(童城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崔瑩)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8]
3. 2. 조선
- 석여명(石汝明) : 호는 화원(花園). 1374년(공민왕 23)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 멸망 후 두문불출하였다. 태종이 집현전제학을 제수했음에도 응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사후 태종이 충청북도 충주시 수의산(守義山) 회문동(回文洞)에 안치하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하였다.[8]
- 석재준(石載俊, 1866년 ∼ 1945년) : 자는 경수(慶秀), 호는 소계(小溪). 『경학원문목』을 저술하고, 『충주홍주석씨세보(忠州洪州石氏世譜)』의 서문을 썼다. 문집으로 『소계선생문집(小溪先生文集)』이 전해진다.[8]
- 석성국(石成國, ? ~ 1895년) : 조선 말기 의병. 1895년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청주에서 한봉수(韓鳳洙)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군을 염탐하려 홀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붙잡혀 자결하였다.[8]
- 석창문(石昌文, 1885년 ∼ 1908년) : 구한말 의병. 1907년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 문제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속리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많이 죽였다. 1908년 군무(軍務)로 혼자 오대산에 가던 중 일본군에 포위되어 끝까지 싸우다 체포되었다. 의병군의 소재를 묻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었다.[8]
3. 3. 일제강점기/광복 이후
- 석진형(1877년 ~ 1946년): 구한말 법률가이자 일제강점기 관료였다.[8]
- 석재준(1866년 ~ 1945년): 자는 경수(慶秀), 호는 소계(小溪)이다. 학문이 탁월하여 『경학원문목』 등을 저술하였으며, 『충주홍주석씨세보(忠州洪州石氏世譜)』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집으로 『소계선생문집(小溪先生文集)』이 전해진다.[8]
- 석성국(? ~ 1895년): 조선 말기 의병.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청주에서 한봉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군을 염탐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붙잡혔으나 자결하였다.[8]
- 석창문(1885년 ~ 1908년): 구한말 의병.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 의병에 가담하여 속리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많이 죽이는 공을 세웠다. 1908년 군무로 오대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에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 혀를 깨물고 자결하였다.[8]
4. 과거 급제자
충주 석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4. 1. 고려
구 분 | 과거 급제자 |
---|---|
고려 문과 | 석여명(石汝明) |
문과 | 석기곤(石基坤) 석방진(石邦珍) 석종진(石宗珍) |
무과 | 석계근(石戒謹) 석계신(石戒信) 석계욱(石啓郁) 석광득(石光得) 석구하(石龜夏) 석기명(石璣明) 석기삼(石起三) 석대운(石大雲) 석도제(石道濟) 석두만(石斗滿) 석만찬(石萬贊) 석만채(石萬采) 석문오(石文五) 석옥주(石玉柱) 석우영(石遇榮) 석유형(石有衡) 석익득(石益得) 석입암(石立嵓) 석잠암(石岑巖) 석지암(石之巖) 석지해(石之海) 석춘옥(石春玉) 석태연(石泰淵) 석흥민(石興敏) 석흥복(石興福) |
생원시 | 석관민(石冠岷) 석재성(石再星) 석지강(石知剛) 석치윤(石致潤) |
진사시 | 석도주(石道周) 석응선(石應璿) 석진우(石鎭宇) 석찬제(石燦齊) 석치강(石致康) |
음관 | 석기곤(石基坤) |
4. 2. 조선
5. 집성촌
6. 항렬자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
정(楨) | 병(炳) | 균(均) 원(源) | 진(鎭) 현(鉉) | 순(淳) 환(煥) 영(永) 홍(泓) | 주(柱) 균(均) | 정(鼎) |
7. 문화재
8. 인구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충주석씨 忠州石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0
[3]
웹사이트
충주홍주석씨대종회
http://www.seokfamil[...]
2022-09-04
[4]
웹사이트
석씨(石氏) 본관(本貫) 충주(忠州)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5]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LST_107_618_0212
[6]
한국향문화전자대전
석여명
https://terms.naver.[...]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문성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문성
http://encykorea.aks[...]
[9]
문화재청 문화재
영주 강동리 충주석씨재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